#독서
2023년에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를 쓴 이유 중 하나는 '지금-현재'의 의료 상황을 개괄적으로라도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이 있었으면 했어서였다. 계기는 2020년의 의사 파업이었는데, 그때 정말 좀 놀랐었다.
일상을 살기에 바쁜 보통 시민들이야 의료계의 구체적 사정에 애써 관심을 둘 이유가 적으니, 의료계에서는 상식처럼 통용되는 정보들을 모르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세상 갖은 일에 관심을 두는 지식인층도 별반 다르지가 않더라는 게 문제였다. 큰 차이가 없더라고.
그래서 이래저래 까닭을 묻다 보니,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첫째는 당사자인 의료인이 스스로의 본업이 바빠 그런 내용을 전달할 여유가 그리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체계 자체의 복잡성이 커 정작 임상의 개개인들도 피상적이고 부분적인 지점들만 아는 경우가 많더라는 점이다.
당사자들조차 본인이 속한 체계 전체를 오롯이 이해하지는 못하는데, 막상 그 체계에 활발히 참여하는 중에는 시간적 여유가 극도로 부족해 이를 언어화할 사람도 적다. 언어화할 능력이 있는 이들 중 소수가 실제로 글을 쓰고, 그중 다시 일부만이 책을 낸다. 오지랖 넓은 지식인이라도 알래야 알 방법이 없던 거다. 그래서 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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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으로보면, 이것보다 더 엉망인 영역 중 하나가 대학 입시다. 의료인들은 면허 취득 후 은퇴까지는 같은 일을 하기라도 하지, 수험생을 업으로 평생 하는 사람은 없다. 그뿐인가. 의료는 전문화된 분과로 인식하기라도 하지, 입시는 본인들도 겪어본 생애과정이라 모두가 전문가다.
문제는 표면적으로 "입시"라는 표현만 공유하지, 각 세대가 경험한 입시는 몇 년 단위로도 내용적으로 극명하게 달라진다. 등급제 도입 이전의 00년대 초반의 수능과, 내가 겪은 10년대 초반의 수능, 요즈음인 20년대의 수능은 여러 층위에서 다른 시험이 됐는데. 사교육에 종사하거나, 학부모가 되지 않는 한 지식을 업데이트 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현재 입시의 당사자들은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사회초년생들이다. 사회 전체에서 교육이라는 분과, 그리고 입시라는 체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전체적으로 조망해주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적극적 참여자는 공부에 여력을 쏟아 본인들의 정황을 알릴 겨를이 없다.
그래서 작년께의 '킬러 문항' 사태에서 드러나듯, 입시제도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사회적 논의는 헛돌기 쉽다. 내가 학력고사 쳐봐서 아는데, 내가 1학기에 수시1차 합격해봐서 아는데, 내가 학종으로 입학해봐서 아는데. 각자의 단편적 경험만 나열되는 아수라장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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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진과 단요가 쓴 <수능 해킹>은 '지금-현재'의 입시제도 풍경을 세밀하고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저자들의 이력, 사교육에 몸 담았던 경험, 그 업계에서 연 맺은 이들과의 풍성한 인터뷰가 이 놀라운 작업을 가능케 했다. 2020년대 입시를 알고 싶으면 이 책만 읽어도 될 것 같다.
책의 제호가 의미하듯, 수능은 해킹됐다. 보다 적확하게는 '해킹될 수 있게' 정형화된 패턴화가 굳어졌다. 루믹스 큐브를 처음 만지는 사람이 6면을 각자 같은 색으로 맞추는 건 무척이나 까다로운 혹은 반쯤 불가능한 일이지만, 실제로 루믹스 큐브는 '공식'이 있지 않은가.
근래의 수능도 마찬가지다. 사교육이 뽑아낸 패턴화된 수능의 공식을 반복숙달하면, 수능 성적은 오른다. 그러다 보니 그 패턴을 극도로 내재화한 이들만 풀 수 있는, 소위 '킬러 문항'들까지 나타났고, 현상을 오해한 이들은 허상을 때려잡는다며 칼춤을 추다 수험생들의 불신만 샀다.
그런 패턴화된 수능이 왜 나왔는 지, 사교육은 그것을 어떻게 해킹하고 있는 지, 그리고 수능 바깥의 수시제도와 지방-서울 간의 격차는 왜 확대되고 있는 지 등의 현재 입시 관련된 제도를 정말 포괄적으로 잘 풀어낸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행태를 착실히 수행하는 방향으로 풀어내면, 입시 컨설팅 도서로 바꿀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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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분석은 탁월하나, 저자들이 제시하는 '해법'에 까지 동의하진 못하겠다.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그것을 교정 혹은 완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까지 갖추고 있음에도 이를 교육을 통한 '공정한 입시'로 풀어나가자는 한국 특유의 조금 뒤틀린 인식이 은연중에 짙게 깔려있어서다. (관련된 구체적 반론은 기회가 닿는다면 <중국필패>와 연결해서 쓸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저자들이 책 말미에서 강조하듯, 어떤 입시가 바람직한지, 어떤 교육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논의는 적확한 현상파악 이후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 읽은 가장 탁월한 책 세 권을 뽑으라면 이 책은 꼭 꼽고싶다.